역사를 바꾼 독감,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한 문장 요약1918~1919년 “스페인 독감”은 파리 강화회의의 향방과 베르사유 조약, 식민지 조선의 사회 분위기까지 뒤흔들며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역사를 뒤흔든 보이지 않는 적, 독감
1919년 4월 파리 강화회의.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정상들이 모인 회담장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갑자기 심한 기침 발작을 일으켰다. 밤사이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린 그는 급히 침실로 실려 나갔다. 처음엔 독살이라 의심될 만큼 위중한 상황이었지만, 사실 범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였다. 윌슨의 주치의 그레이슨은 대통령이 독감에 걸렸음을 알고도 언론에는 “단지 감기에 불과하다”고 거짓 발표를 했다. 이때 윌슨을 쓰러뜨린 “스페인 독감”은 이미 전 세계를 휩쓸며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었다.
윈스턴 처칠 등 연합국 지도자들과 협상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있던 윌슨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독감 투병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다. 불과 며칠 사이, 파리 강화회의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전쟁 직후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상하던 윌슨은 고열에 시달린 뒤로 예전의 패기를 잃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14개 조 항” 이상(理想)을 거의 포기한 채, 프랑스 총리 클레망소 등이 요구하는 대로 독일에 대한 가혹한 처벌 조항들에 동의하고 말았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순간이었다.
세계를 휩쓴 죽음의 독감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전 세계를 강타한 독감 대유행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 중 하나로 기록된다. 이른바 “스페인 독감”으로 불린 이 질병은 H1N1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한 유행병으로, 1차 세계대전 말기에 시작되어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갔다. 당시 전 세계 인구의 약 3분의 1에 달하는 5억 명 가량이 감염되었고, 사망자만도 최소 5천만 명에 이르렀다. 최근 연구자들은 사망자가 최대 1억 명에 달했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으며, 이는 군인과 민간인을 통틀어 1차대전의 전쟁 사망자(약 1천7백만 명)를 훨씬 능가하는 인류적 참사였다. 문자 그대로 전쟁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독감이었던 것이다.
이 독감 바이러스는 지구촌을 순식간에 삼켰다. 1918년 3월 미국 캔자스주의 한 군 부대에서 첫 환자가 보고된 후, 전쟁을 위해 대륙을 오가는 병력 수송선과 열차를 따라 병원균이 세계로 퍼져나갔다. 병사들은 참호에서 총뿐 아니라 독감 바이러스와도 싸워야 했다. 프랑스, 영국 등 참전국의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쓰러졌고, 인도와 중국, 아프리카 등지의 식민지 주민들도 대거 목숨을 잃었다. 특히 의료 인프라가 취약한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희생 비율이 높았는데, 이를테면 인도에서는 약 1,200만~1,800만 명(인구의 5%)이 숨져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인구의 상당수가 사라지는 비극도 발생했다. 실제로 서부 사모아에서는 주민의 4분의 1이 독감으로 목숨을 잃었고, 반면 철저히 차단에 성공한 미국령 사모아는 사망자가 한 명도 없었던 극단적 대비도 있었다.
전쟁과 독감은 맞물려 더욱 큰 재앙을 낳았다. 교전국들은 병사들의 사기를 고려해 전시 검열로 독감 유행을 숨겼고, 이에 따라 효율적인 방역 조치도 초기엔 뒷전이었다. 하지만 전장의 병사들은 바이러스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독일군 최고사령부의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은 1918년 봄 마지막 총공세를 준비했지만, 독감이 독일군을 휩쓸어 많은 병력이 쓰러지는 바람에 공격을 연기해야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루덴도르프는 부하들이 병들어 가자 “이것으로 전쟁은 끝났다”고 절망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그해 가을 독일은 독감으로 전력까지 소진된 채 항복을 맞았고, 유럽 전쟁은 막을 내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승전국 정상들이 전후 처리 회의를 위해 모인 바로 그 순간에까지 독감 바이러스는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것이었다.
윌슨의 독감 투병과 뒤바뀐 평화회의
1918년 미국 시애틀에서 마스크를 쓴 경찰관의 모습. 1차대전 중 독감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 서부 여러 도시에서는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다. 대중은 이를 애국적인 의무로 받아들였지만 일부는 마스크에 담배를 피울 구멍까지 뚫으며 반발하기도 했다.
독감 바이러스는 전쟁 직후 세계 질서를 결정짓는 역사적 현장도 파고들었다. 1919년 초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적의 공격을 받았다. 4월 3일 밤, 윌슨은 머무르던 파리의 호텔에서 갑작스러운 기침과 함께 쓰러졌고, 이튿날부터 고열과 호흡 곤란에 시달렸다. 당시 만 63세였던 그는 평소 건강한 편이었지만, 독감은 나이를 가리지 않았다. 회의 한복판에서 쓰러진 대통령을 보고 일각에서는 독살 음모설까지 흘렀으나, 그의 몸을 침범한 것은 다름 아닌 독감 바이러스였다. 윌슨의 열이 40°C까지 치솟자 주치의는 처음엔 독을 의심했지만 곧 “1918-19 유행 독감”에 감염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국제 회담 중 대통령의 중병 소식이 알려질 경우를 우려한 측근들은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윌슨의 주치의는 기자들에게 대통령이 단지 “심한 감기”를 앓고 있을 뿐이라고 거짓 발표를 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던 세계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이 역사적인 협상 도중 독감 투병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윌슨 대통령은 5일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앓았다.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는 동안 그는 극심한 정신적 혼란과 피해망상 증세까지 보였다고 전해진다. 워싱턴까지 동행한 비서들은 “대통령의 정신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회고했고,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병상을 찾아온 자리에서 윌슨의 상태를 두고 “심각한 신경 및 정신의 붕괴”라고 표현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만큼 강인하던 윌슨을 완전히 무너뜨린 병이었다.
며칠 뒤 간신히 회담장에 복귀한 윌슨은 더 이상 예전의 윌슨이 아니었다. 독감은 그의 체력과 투지를 순식간에 앗아갔다. 불과 발병 전까지만 해도 윌슨은 파리 강화회의에서 자신의 이상주의적 평화 구상(민족 자결, 비밀 조약 폐지, 국제연맹 창설 등 14개 조항)을 관철하고자 프랑스, 영국 대표들과 거세게 충돌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클레망소 총리는 윌슨이 독일에 지나치게 관대하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릴 만큼 회담은 난항이었다. 그러나 독감을 앓고 온 뒤 윌슨의 태도는 딴사람처럼 바뀌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지 못했고, 회담 막판에 대부분의 쟁점에서 프랑스와 영국 측 요구에 양보하고 말았다. 클레망소가 끝까지 반대하던 민족자결주의나 “승자 없는 평화” 같은 이상론은 힘을 잃었고, 윌슨이 그나마 사수한 것은 국제연맹 설립안 정도에 그쳤다. 세계 언론은 이 예상 밖의 결과에 놀랐고, 미국 대표단 내부에서는 “대통령이 우리를 배신했다”는 탄식이 나왔다고 한다. 한 참가자는 “윌슨 대통령의 병세 이후 회의는 완전히 방향을 틀었다. 그 ‘작은 병환’ 이후 그는 예전 같지 않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가혹해진 독일 처우, 나치즘의 그림자
1919년 6월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게 혹독한 전후 배상을 부과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원래 윌슨은 가혹한 보복보다는 공정한 평화를 지향했지만, 병을 앓은 후 더 이상 이를 주장하지 못했다. 그 결과 독일은 모든 전쟁 책임을 인정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하며, 영토와 식민지를 대폭 상실하는 처지에 놓였다. 윌슨의 이상주의는 상당 부분 후퇴했고, 회담을 주도한 승전국들(특히 프랑스)의 처벌적 요구가 관철된 것이다. 이 조약은 당시에는 승전국 여론을 만족시켰지만, 역설적으로 새로운 분쟁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역사가들의 평가는 후혹하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굴욕과 경제적 궁핍이 훗날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의 부상을 부추긴 주된 원인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1920년대 독일에서는 “등 뒤를 찌르는 조약”에 대한 분노가 커졌고,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힘을 얻어갔다.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를 외치며 대중의 분노를 결집했고, 결국 집권에 성공해 2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지폈다. “미래의 전쟁을 막겠다”던 1차대전 이후의 평화협정이 오히려 미래의 더 큰 전쟁을 예고한 셈이다. 만약 윌슨 대통령이 그때 독감에 걸리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원칙을 관철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단정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의 건강 악화가 회담의 양상을 뒤흔든 한 요소였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조약 체결 후 미국으로 돌아간 윌슨은 곧 뇌졸중까지 겪으며 건강을 잃었고, 미국은 정작 윌슨이 그렇게 주장했던 국제연맹 가입도 거부해버렸다.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독감에 쓰러진 세계 지도자들
“스페인 독감”은 윌슨 외에도 수많은 유명 인물을 덮쳤다.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역시 1918년 9월 맨체스터를 방문하던 중 독감에 걸려 쓰러졌다. 독전의 상징이던 그는 갑작스런 인후통과 고열로 주저앉았고, 10일간이나 병실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다. 당시 그를 돌본 간호진은 산소 호흡기까지 동원해야 했고, 언론은 총리의 병세를 축소 보도했지만 실제로는 “생사가 경각에 달린(touch and go)” 위중한 상황이었다고 측근은 전한다. 가까스로 쾌유한 로이드 조지는 이후 회복 소식을 국민들 앞에 전하며 전쟁 승리를 자축했지만, 그 역시 한때 유행병의 희생자가 될 뻔했던 것이다.
인도의 민족지도자 마하트마 간디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 식민지 인도에서는 독감으로 1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간디 본인도 1918년 독감에 감염되어 상당 기간 병마와 싸워야 했다. 훗날 간디는 “서구 문명이 가져온 재앙”이라며 이 참상의 원인을 식민 지배의 악행과 연결짓기도 했다. 인도 전역에 퍼진 죽음과 경제적 혼란은 영국 통치에 대한 반감을 더욱 키웠고, 독립운동의 감정을 한층 격화시켰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1919년 인도 곳곳에서는 독립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와 폭동이 발생했는데, 배경에는 독감으로 인한 사회적 고통과 식민 당국의 무능에 대한 분노도 자리하고 있었다.
왕실과 제국의 수장들도 이 보이지 않는 병마를 피해가지 못했다.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는 1908년에 이미 한 차례 심한 독감을 앓은 바 있었는데, 1918년에도 다시 독감에 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역시 전쟁 막바지에 국민의 지지를 잃고 같은 해 11월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는데, 막대한 전쟁 부담과 더불어 독감 유행으로 인한 혼란이 독일 제국 붕괴의 배경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는 1918년 봄 독감에 크게 걸려 앓았는데 이 소식이 전 세계 신문에 보도되면서 사람들은 이 병을 “스페인 독감”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영국 국왕 조지 5세가 군함 승조원들에게 번진 독감에 감염되어 한때 함대를 멈춰 세웠고, 에티오피아의 황제가 자신의 국민들보다 먼저 독감에 걸렸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심지어 미국의 미래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도 해군 차관보 신분으로 유럽을 방문했다가 귀국길에 독감에 걸려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이처럼 신분과 국경을 가리지 않는 전염병 앞에서 “귀족이나 거지나 똑같이 마스크를 쓴 환자일 뿐”이라는 자조가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왜 하필 ‘스페인 독감’인가?
전 세계인들이 공포에 떨던 이 대유행병을 부르는 이름이 하필 “스페인 독감”이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사실 이 독감의 기원은 스페인이 아니었다. 1918년 당시 스페인은 1차대전에 중립국으로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전시에 엄격한 보도 통제를 하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스페인 언론은 자국에서 벌어지는 독감 유행 상황을 비교적 솔직하게 전했다. 1918년 5월 말 마드리드 신문들은 정체불명의 독감이 퍼지고 있다는 소식을 대서특필했고, 일주일 뒤에는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마저 독감에 걸렸다는 보도가 나왔다. 전쟁 중 검열로 입을 다물고 있던 연합국과 동맹국 기자들은 이 소식을 스페인발로 받아쓰며 크게 퍼뜨렸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독감은 스페인에서 시작됐다”는 인식이 굳어졌고, 급기야 유럽인들은 이 병을 “스페인 독감”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정작 스페인 사람들은 이 질병을 “프랑스 독감”이라고 불렀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프랑스 군인들이 바이러스를 옮겼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처럼 명칭에 얽힌 오해와 달리, 질병의 실제 발원지에 대해서는 미국, 프랑스, 중국 등 여러 설이 있고 지금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전시 검열로 각국이 정보 은폐에 급급했던 사이, 스페인의 자유로운 보도가 오히려 전 세계에 경각심을 주기는커녕 스페인을 억울한 “오명”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일상과 사회를 덮친 공포
그렇다면 당대 보통 사람들의 삶은 이 독감으로 어떻게 바뀌었을까? 1918-19년에 걸친 독감 유행은 세계 각지에서 일상의 풍경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전쟁의 포연이 가라앉기도 전에 등장한 새로운 적에 대응하기 위해, 각국 정부와 지방 당국은 부랴부랴 방역 조치를 시행했다. 학교와 극장, 교회는 문을 닫고 모임이 금지되었으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과 거리는 한산해졌다. 각종 위생 수칙이 신문 지상을 도배했고, “침 뱉지 말 것”, “손수건을 지참할 것”, “사람과 거리를 둘 것” 등의 권고가 쏟아졌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마스크 착용이었다. 1918년 당시에는 현대적인 마스크는 없었지만, 면과 거즈로 만든 간이 마스크를 대중적으로 착용하기 시작한 첫 사례가 바로 이 시기였다. 미국의 일부 도시들은 아예 마스크 착용을 법으로 의무화했고, 쓰지 않으면 벌금을 물리거나 감옥에 보내기도 했다. 전쟁 중이던 미국에서는 “마스크 착용은 곧 애국”이라는 구호까지 나왔고, “지금 마스크를 안 쓰는 남녀는 게으름뱅이(slacker)이며 위험인물”이라는 적십자 포스터가 나돌았다.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는 경찰이 시민들에게 마스크를 강제하고 위반자 100여 명을 하루만에 체포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물론 모두가 순순히 따르지는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답답하고 소용없다는 이유로 마스크 착용을 거부했고, 어떤 이들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마스크에 구멍을 뚫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더 이상 군인을 지킬 필요가 없다”며 마스크 의무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1919년 1월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수천 명이 모인 “반(反)마스크 연맹”이 결성되어 시 당국에 항의 집회를 열기도 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황당해 보이지만, 100여 년 전에도 방역 규칙을 둘러싼 순응과 반발의 모습이 존재했던 것이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말 그대로 공포와 상실감 그 자체였다. 불과 몇 년간의 전쟁으로도 엄청난 희생을 치렀는데, 이어 닥친 전염병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쓰러뜨렸다. 신문 지면에는 연일 부고 기사가 빼곡했고, 하루아침에 가족과 친구를 잃은 이들이 속출했다. 거리에는 방역을 위해 소독약 냄새가 진동했고, 마차와 트럭들이 시신을 수거해 공동묘지로 향했다. 각국의 의료체계는 감당 불가능한 환자 급증으로 마비되었으며, 병상과 의약품이 모자라 학교, 공연장이 임시 병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 한켠에는 “세상이 끝나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절망감이 싹텄다. 일각에서는 이 재앙을 두고 “신의 벌”이나 “인류에 대한 경고”라고 해석하며 종교 집회에 몰려들었지만, 교회와 사찰마저 문을 닫자 모두가 속수무책으로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큰 충격을 주었던 1918년 독감 대유행은 이후 역사 기록과 대중 기억에서 비교적 빨리 잊혀졌다. 이는 바로 앞선 1차 세계대전의 그늘에 가려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전쟁 직후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전쟁 영웅”담론에 몰두했고, 상대적으로 독감에 대한 기억은 집단적으로 억눌렸다. 명확한 가해자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찾아온 천재지변은, 인간이 벌인 전쟁만큼 서사적으로 부각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분명히 사회를 바꿔놓았다. 살아남은 세대는 전쟁과 전염병을 연이어 겪으며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 변화를 맞이했다. 일부 학자들은 1920년대 “잃어버린 세대”의 향락과 방종 문화, 그리고 예술계의 허무주의적 흐름 배경에 이 독감의 트라우마가 한몫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실제로 문학가들과 예술가들 중에는 이 독감을 겪은 이들이 많았고, 그 경험이 작품 세계에 드러나기도 했다. (다음 편에서 자세히 다룰 주제이다.)
조선을 강타한 스페인 독감
한편 1918년 가을에 번진 독감의 검은 손길은 한반도도 예외 없이 덮쳤다. 당시 조선은 일제 강점기라 정확한 상황이 식민 당국에 의해 은폐되었지만, 이후 연구자들의 분석으로 그 참상이 밝혀졌다. 세브란스 의학교에서 근무하며 독립운동을 도왔던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1919년 논문에서 “1918년 9월부터 조선 인구의 1/4에서 1/2이 독감에 걸렸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당시 교사와 학생들의 발병률이 높아 대부분 학교가 문을 닫았다”고 전하며, 실제 감염자와 사망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본 당국이 발표한 수치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식민지 조선 총독부는 언론 보도를 철저히 통제했기 때문에 조선 내 독감 유행 정도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총독부 내부 통계는 그 규모를 말해준다.
1919년 3월 조선총독부 공식 집계(1918년)
추정 인구: 17,057,032명
독감 환자 수: 7,556,693명
사망자 수: 140,527명 (치명률 약 1%, 전체 인구 대비 약 0.82%)
전체 인구의 약 44%에 달하는 사람이 독감에 걸렸고, 그 중 14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이다. 이는 1차대전 당시 조선인 전체 사망자(강제징병 등 포함 추산치 약 2만여 명)보다 훨씬 큰 규모로, 바로 그 시기 한반도에서 벌어진 최악의 재난이었다. 하지만 일본 총독부의 대응은 미흡하기 짝이 없었다. 예방 백신이나 치료제는커녕 효과적인 방역 시도조차 거의 없었고, 총독부 경무총감부는 그저 헌병 경찰들을 동원해 각 가정을 방문하며 환자와 사망자 수를 집계하는 데 급급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죽어나가는 상황을 수동적으로 숫자 세는 것 외에 해준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일본은 자국 내에서도 독감에 속수무책이어서, 도쿄 등지에 임시 예방접종소를 열어 백신을 배포하려 했지만 조선에는 그런 조치조차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날마다 주변 사람이 갑자기 쓰러져 목숨을 잃는 일상적인 죽음을 목격해야 했다. 밀집된 가옥과 열악한 위생환경에서 독감은 도시와 농촌 가릴 것 없이 맹위를 떨쳤지만, 총독부는 언론 통제로 일관하며 충분한 경고나 지원을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1910년대 후반 조선은 일제의 수탈로 식량 사정까지 악화된 때였다. 영양실조와 과로에 시달리던 민중에게 독감은 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사회 전체가 공포와 무력감에 빠져들었고, 총독부의 권위는 급속히 추락했다.
이러한 식민지 조선의 독감 참사는 이듬해 벌어진 거대한 역사적 사건과도 맞닿아 있다는 주장이 있다. 1919년 3월, 전 민족이 들고일어난 3·1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일각에서는 “10년간 지속된 일제의 무단통치에다 독감 방역 실패로 누적된 절망과 분노가 임계점에 달한 결과가 3·1 운동으로 폭발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실제로 독감 유행 직후인 1919년 초 조선의 사회 분위기는 전에 없이 뒤숭숭하고 혼란스러웠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식민 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고, 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에 대한 열망이 급격히 타올랐다. 독감으로 문을 닫았던 학교들이 1919년 2월 무렵 다시 열리자마자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 시위를 준비했다는 일화도 있다. 물론 3·1 운동은 민족 자결과 독립 정신에서 나온 것이지만, 배경에 깔린 시민들의 분노와 좌절감을 독감 사태가 크게 증폭시킨 측면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이 일상인 현실 속에서 더 잃을 것이 없다는 심정이, 거대한 항거의 에너지로 전환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어쩌면 ‘스페인 독감’은 조선 민중의 가슴에 쌓인 울분에 마지막 불씨를 던져준 셈인지도 모른다.
맺음말: 보이지 않는 힘이 바꾼 역사
1918~1919년의 독감 대유행은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에도 깊숙이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이 사건은 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 “잊힌 팬데믹”으로 불리기도 했다. 총성과 포성이 난무했던 전쟁의 기억에 밀려, 조용히 찾아와 더 많은 죽음을 남긴 독감의 존재감은 희미해진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지휘자는 총칼을 든 장군이나 책상을 두드리는 정치가만이 아니다. 때로는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 하나가 제국을 무너뜨리고,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고, 혁명의 도화를 당기는 숨은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역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하나로도 뒤바뀔 수 있다.
이 거대한 1918년 독감 팬데믹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당시 이 질병을 겪은 사람들의 예술과 문학 작품 속에도 독감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살아남은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통과 상실을 창작물에 투영했다. 다음 편에서는 예술과 문화 속에 남은 스페인 독감의 자취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 (계속)